*스포일러나 너무 구체화 된 정보가 싫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살짝.
긴 호흡이 필요한 영화다. 영화는 현실과 비슷한 정도의 감으로 한 커플, 로렌스와 프레드의 시간을 보여준다. 빠른 장면의 전환과 특수효과에 익숙하지만 두시간 넘어가는 영화에는 취약한 사람에게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두 번 봤다. 처음 보러 갔을 때 생각 없이 밤 새고 갔다가 주요한 장면마다 조는 바람에. 두번째 볼 때는 마음 단단히 먹고 눈을 부릅떠서 봤다.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가득했다.
무슨 말부터 써야할까. 마음이 벅차고 머리가 뒤죽박죽이어서 잘 정리가 안 된다. 세 시간 가량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나면 그저 멍하다. 확실한 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의자에 파묻혀서 여운에 빠져있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점이다. 내가 본 영화들 중에 색감과 음악 선택은 단연 발군이다. 처음 만난 자비에 돌란이라 섣불리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그만의 매력이 영상에 가득 담겨있다.
처음에는 흔하디 흔한 오랜 연애의 늪, 즉 지지부진한 관계에 대한 영화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연인을 잃는, 잃어가는 과정에서 프레드가 느끼는 상실감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과 들쭉날쭉한 감정변화에 시선이 갔다. 하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 프레드의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로렌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의 고백 이후 로렌스는 프레드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조금씩 자신의 본모습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아마도 프레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지 싶다. 그 혹은 그녀에게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여자는 오직 프레드뿐이었으니까.각자의 옆에서 프레드와 로렌스는 그들이 말하듯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았고, 그랬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쩌면 프레드야말로 로렌스로 하여금 스스로의 욕망을 찾아 한 걸음 내딛게 한 가장 큰 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레드였기 때문에. 프레드라서.
어찌 되었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여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로렌스의 고백을 프레드는 예상 외로 금새 인정한다. 그 이유가 로렌스에 대한 사랑이었든 동정이었든, 영화 초반 둘의 관계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인다. 하지만 책임의 범위가 늘어나자 결국 프레드가 먼저 로렌스를 떠난다. 로렌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 준 프레드의 자유분방함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별을 말하는 프레드 앞에 로렌스는 남자로 나타난다. "왜 여장하고 나오지 않았어?"라는 말에 "자기를 위해서."라고 애원하는 로렌스의 눈에는 그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프레드를 다그쳐보지만, 결국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이 왔음을 알았을 때, 로렌스가 할 수 있었던 전부는 단호하게 계산서를 요구하는 것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카페에서 프레드가 화를 내던 장면과 비등할 정도로 강렬했던 장면이라 생각한다.
정상적인 남자를 만나 평범하기 그지 없는 가정을 꾸린 프레드의 삶은 겉보기엔 좋아보이나 무미건조하다. 쉽사리 초조해지고, 불안해하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는 나날들. 그런 일상들 와중에 도착한 로렌스의 시집은 프레드의 삶을 다시 송두리째 흔든다.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나지만, 프레드에게는 로렌스와 '정상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늠이 먼저다. 둘 사이의 비극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전보다 뚜렷해진 로렌스와, 사랑하는 이와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프레드. 그들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의 어긋난 욕망은 결국 다시금 재앙의 씨앗이 된다. 그토록 혐오하던 남자의 모습으로까지 나타나 프레드를 붙잡았던 로렌스에게, 프레드의 무책임함은 단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번에는 로렌스가 프레드를 떠난다. 아마 이 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로렌스가 온전히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한 시점이.
마지막 만남에서의 로렌스는 확실히 전과 다르다. 자신감 넘치고, 프레드에게 서스럼 없이 말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엉망이었어. 내가 여자가 되기 전부터. 이미." 그 말에 프레드는 상처받지만, 로렌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은 각자의 길로 사라진다. 서로에게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단계에 도달한 걸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그 깊은 속내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있다. 마지막 로렌스의 모습에서, 오래 전 프레드의 모습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매처럼.
길고 긴 그들의 시간은 처음으로 돌아와 끝이 난다. 프레드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로렌스는 씩 웃는다. "Laurence, Anyways." 어떤 형태이든 어떤 모습이든, 결국엔 로렌스 애니웨이.
* 개인적으로 좋았던 명장면들
영화 초입, 로렌스를 쫓는 사람들의 시선
영화 초입, 로렌스를 쫓는 사람들의 시선
카페, 프레드와 로렌스의 첫 이별
Visage의 Fade to grey가 울려퍼지던 파티에서의 프레드
블랙 섬에 처음 당도한 프레드와 로렌스의 미소
Visage의 Fade to grey가 울려퍼지던 파티에서의 프레드
블랙 섬에 처음 당도한 프레드와 로렌스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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